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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와 매지스트가 만나서 일어난 이야기

전문 편집

이 이야기의 시점은 루이 아드 편 이후, 시간여행단 편 이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앞으로 자동인형시장은 스타베리아는 물론 블루월드 전역에 산업혁명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에 맞춰 우리 지아이디는 이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입지를 선점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금주의 지아이디의 성과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후…. 발표를 마쳤다. 격주마다 우리 지아이디 그룹의 주주들을 불러놓고 그간의 실적 및 앞으로의 경영 방침을 보고하는 자리. 다시 말해 지아이디 그룹의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원래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건 지아이디의 네오 행장이다. 그러나 이곳에 서 있는 건.

바로 나 청초다.

네오 부행장, 그는 자기 직위를 일부러 부행장으로 떨어뜨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을 행장으로 내세웠다. 예언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고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던가 뭐라나.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필요한 건 모두 지원할 테니, 지아이디는 청초 자네가 알아서 경영하게.’

네오 부행장은 사실상 나에게 지아이디의 행장직을 위임한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하달받는 경영방침 외에는 전부 나 홀로 판단해 지아이디 그룹을 움직이고 있다. 오늘의 보고도 ‘트레져스트 지원 성과’, ‘자동인형 적극 투자’는 네오 부행장이 기획하고 진행한 일이지만, 그 외의 ‘지아이디 사내 복지 강화’, ‘학교 및 복지시설 지원’, ‘스포츠 인재 육성’, ‘제1 공업지구 프로젝트’는 내 독단이다. 네오 부행장에게 결재만 형식상 받을 뿐이며 그가 내 일을 반대한 적은 없다.

“이번에 트레져스트를 지원해 루이 아드 유적을 발굴한 성과는 높이 살 만하군.”

“무통증 연구가 아닌 자동인형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는 1년 전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군. 지금 SSC를 봐! 비인도적 실험을 자행한 무통증 연구팀은 해체됐어.”

“행장은 이걸 예견하고 그 실험에 투자하지 않는 걸 고집했던 거군.”ㅍ

“훌륭한 통찰력이야.”

오늘의 보고도 성황리에 마친 것 같다. 아아 피곤해. 빨리 남은 서류 결재하고 집에 가 탕수육에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으음. 나는 다른 생각인데? 트레져스트는 아이들을 유괴한 의혹을 사고 있다. 이들의 범죄가 사실로 드러나면 지아이디 주가에 타격이 올 텐데? 거기에 자동인형 연구는 르나르 1인으로만 유지되고 있다. 그 남자가 없으면 자동인형시장은 문조차 열지 못해. 그런데 지금 그 남자는 이반 제국에서 행방불명 상태다. 뭘 어쩌자고 투자하겠다는 거지? 뇌제가 처형한 걸 수도 있는데 투자하겠다고? 헛돈만 나갈 거다.”

아 진짜. 저 인간 또 시작이네.

“지아이디 그룹의 최대 주주로서 제안한다만, 무통증 연구에 적극 투자하는 걸 권장하지. 성공한다면 의료업계에서 위상이 높아질 것이다.”

이 목이라는 놈. 이름도 모기 같은 게 아버지가 물려준 수억 대의 재산만 믿고 나대는 머리 빈 놈이다. 돈만 뿌리면 다라고 생각하는 건지, 매 정기보고 때마다 헛소리를 짓껄인다.

“목이 님. 트레져스트의 행동은 무혐의로 판결났고, 에셔 본 르나르 님과는 이미 한 달도 더 전에 계약했다고 보고드렸습니다. 그리고 무통증 연구의 경우 인체실험에 대한 비판으로 연구가 중단됐는데 그걸 지금 지아이디에서 투자하면 언론이 우릴 어떻게 볼지 생각은 하셨습니까? 즈블 승극 즘 흐그 스습시으…(제발 생각 좀 하고 사십시오)”

짜증이 솟구쳐 이를 빠드득 갈며 겨우겨우 참아가며 말했다. 전부 오늘 말한 내용인데 듣지도 않았구만 이 인간.

“음? 내 얘기를 못 들은 건가? 무통증 산업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니까?”

으니 진쯔….

인체실험 때문에 무통증 연구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인데, 이 시국에 그 연구에 투자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생각을 못하는 건가?? 큰돈은 개뿔, 인체실험에 투자하는 기업이라고 주가 떨어지고 인식 나빠져서 지 투자금 다 날려먹을 텐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자. 참자.

“참 나. 청초 씨. 자네가 한낱 비서라서 뭘 몰라서 그래. 이 지아이디를 경영하는 행장님은 내 의견에 적극 찬성할 거야.”

이 모기 놈아. 그 행장이라는 게 나다.

“하, 거 참. 자네가 여기에 서서 우리들한테 보고한다고 뭐 좀 되는 줄 아나 본데. 이봐, 자네는 그저 유능한 행장님 대신 이곳에 서 있는 녹음기일 뿐이야!”

“아나, 이….”

….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린다. 전원 날 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화를 내면 내 속은 시원해지겠지. 하지만…. 하지만….

“….”

“청초 씨. 왜 말을 하다 마는 거지?”

화를 내선 안 된다.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이 님의 의견은 행장님께 보고드리고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야 자기 분수를 좀 아네!”

후우…. 참자. 참자. 회의가 끝나 모두 회의실에서 나간다. 타오르는 속을 겨우겨우 삭이며 심호흡을 한다. 혼자 남은 회의실. 어떻게든 추스르려 하지만 참지 못해 화장실에 들어간다.

“….”

세수를 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다. 왜 화를 내지 않았니 청초야. 최대주주라서? 아니. 그럼 왜 화를 안 내?

“….”

그래. 여기는 화장실이고, 아무도 없어. 화내도 돼. 분노에 찬 호흡을 가다듬으며 겉옷과 와이셔츠를 벗는다. 어깨까지 팔의 맨살이 다 드러난 민소매 차림이 된다.

“아아 진짜….”

‘화르륵’

아까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솟구친다.

“개 같은 놈 제발 모르면 입 닥치고 가만히라도 있으라고!!!!”

‘화르르륵’

마음속에 삭여두던 말들이 입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름부터 모기인 놈이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이 자식 귀는 왜 달고 다니냐!!! 뇌는 있냐!!!!!!! 그리고 뭐? 내가 녹음기일 뿐이라고?! 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여기 행장이다 이 새끼야!!!!!!”

가슴 속에 꾹꾹 억눌렀던 화를 터뜨린다.

‘치이이이이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장실의 천장에서 화재진압용 물이 뿜어져나와 흠뻑 젖는다.

“하아…. 하아….”

화를 냈더니 이제 좀 살 만하다. 화를 낼 때마다 화재경보가 울리며 물이 뿌려지는 것도 이젠 적응된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딱 봐도 화난 것 같은 표정. 그리고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살갗에서 치솟는 새빨간 불. 그 불 때문에 켜진 화재경보기.

나는 이것 때문에 아까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지 못했다. 그곳에서 화를 내면 몸에서 난 불 때문에 옷이 타버릴 거고, 화재 경보 때문에 다들 흠뻑 젖어버릴 테니까. 그래서 화를 참았던 거다. 난 감정을 표출하면 몸에서 불이 나는 [감정불꽃]이라는 악령의 소유자다.

“하아….”

벗어놓은 와이셔츠랑 겉옷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아, 씨. 비서실까지 가서 갈아입어야 되잖아.

“에휴. 내 신세야.”

내 악령 [감정불꽃]은 내가 감정을 발산하면 몸에서 불이 치솟는 힘이다. 그 때문에 난 지금껏 화내지도, 웃지도, 울지도 못해 보았다. 심지어 사랑도. 내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 두려워한다.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이들 불꽃은 내 감정에 따른 온도를 낸다. 지금처럼 화를 내면 뜨거운 시뻘건 불이 솟구친다. 한편 웃을 때는 체온과 비슷한 수준의 노란 불길이 난다. 그래도 뜨거우니 만지면 안 된다. 반면 울 때는 차가운 새파란 불이 난다. 파란 불은 원래 뜨거워야 하지만…. 뭐 이건 몸에서 나는 불이니까 그런 거 따져봤자인가. 내가 슬플 때 나는 불은 만지면 차갑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불은…. 모르겠다. 얘는 본 적이 없다.

“에휴, 내 주제에 사랑은 무슨.”

이 악령 때문에 사람들이랑 거리를 두고 살아온 탓에, 친구는 여자애들로 5명이 전부다. 많이 대화해 본 남자는 아버지랑 네오 부행장 그리고 웃음귀신이 전부다. 네오 부행장은 그냥 직장 상사일 뿐이고, 웃음귀신은 ‘네오 님과 제일 친한 건 저입니다!’며 시비 거는 게 전부다.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옷 갈아입으러 가야지.”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다. 젖은 상의는 팔에 건 채 민소매 차림으로 걷는다. 주주들은 진작에 갔을 것이고, 이곳 34 층에 있는 직원은 아무도 없다. 오늘 같은 일이 있을 때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자 일부러 그렇게 배치했다. 애초에 30층부터는 들어오려면 네오 부행장의 승인이 있어야 하므로 아무나 못 들어오는….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자판기 어떻게 사용하시는 줄… 으아악?! 뭡니까 그 차림은?! 옷 입고 수영이라도 했습니까?! 파렴치하잖아요!!!!”

뭐야 이놈. 자판기 앞에 키 큰 마술사가 눈을 가리고 부끄러워하며 서 있다. 얼굴은 좀 생긴 놈 같은데, 눈에 자신이 없는지 붕대로 칭칭 감아놓았다. 앞이 보이는 건가…? 아, 보이니까 내 모습을 보곤 눈을 가렸구나.

“누구죠 당신? 직원인가요?”

“네?! 아뇨!! 저는 네오 님께서 부르셔서 포베글리아에서 왔는데요!”

고개를 휙 돌려 날 보지 않은 채 대답하는 마술사. 오늘 온다던 매지스트라는 남자군. 네오 부행장은 주기적으로 자신이 도와준 사람들을 부르거나 직접 찾아가서 그 이후 상황은 나아졌는지, 혹시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네오 부행장은 여기 위층에서 매지스트 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단 및 엘리베이터는 저곳을 돌면 바로 나오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앗, 가, 감사합니다… 어?”

마술사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떼지 못한다.

“물에 젖은 여자를 계속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저….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없나요?”

“네?”

난 붕대로 눈 가린 마술사는 본 적이 없는데.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요. 네오 님께선 위층에 계시다고 했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의 부끄러워하던 모습과 달리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한 그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나도 빨리 옷 갈아입으러 가야겠다.

“후, 퇴근이네.”

업무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나온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

아까 본 마술사가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처음 봤을 때랑 달리 되게 침착하시네요. 그런데 아직 안 가셨군요.”

“네. 지금은 당황할 만한 요소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기다렸답니다.”

“왜죠?”

네오 부행장과 이야기가 잘되지 않은 건가? 혹은 만나는 데 실패해서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건가. 침을 꼴깍 삼킨 그는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야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한 내 심장이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리라고 시켰기”

“미친놈. 꺼져.”

“때문에… 아니 거절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장난치러 오신 거라면 쫓아내겠습니다. 애초에 6시를 지난 지금 외부손님은 사내에 계시면 안 됩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죠?”

“한 번만 더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몇 시간이고 이곳에서 기다리겠”

“가보겠습니다.”

“습니잠시만요!!!!! 입사!! 입사 때문에 왔습니다!!!!!”

“입사? 이곳 지아이디에 말입니까?”

마술사가 회사에 취업이라니. 이미 마술로 먹고살지 않나?

“아, 그게 지아이디가 아니라….”

그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어둠속의 망령…입니다.”

“….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네요.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아…. 네.”

네오 부행장은 절대 어둠속의 망령에 가입 권유를 하지 않는다. 세간에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범죄집단에 가입하길 종용하다니. 네오 부행장의 성격상 그런 일은 없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네오 부행장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 둘 모인다. 어둠속의 망령과 네오가 연관있단 걸 이들은 알 턱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 어둠속의 망령은 10명이나 모였는가? 답은 간단했다.

“웃음귀신이라는 남자에게 귀띔 받았나요?”

“맞습니다. 저를 도와주러 포베글리아까지 날아온 그분을 오늘 뵈었습니다. 그분께서 네오 님께 은혜를 갚을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하아….”

역시나 웃음귀신이었다. 이 인간은 네오에게 구원받은 이들이 올 때마다 어둠속의 망령 가입을 종용한다. 아무나 하는 건 아니고, 테러리스트인 걸 알면서도 가입을 결심할 사람들만 따로 선별한다. 그 기준이 뭔지 나야 모르겠다. 자기가 직접 그 사람들을 도우러 가봤으니 어떤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걸 감수하고 네오를 도울지 아는 건가? 아니면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건가? 적어도 지금까지 가입한 사람들은 다 악령이 있던데, 그걸지도 모르겠네.

“아가씨, 어둠속의 망령 입사 절차는 어떻게 됩니까?”

“절차 같은 거 저는 몰라요. 인사권한은 매지스트 씨께 말을 건넸던 웃음귀신 씨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그 남자에게 데려가는 중이고요.”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5층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동안 이 마술사는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청초입니다.”

“이곳 지아이디에서 근무하시나 보네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행장님 비서예요.”

“그렇군요! 아까 흠뻑 젖으셨던 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불나서요.”

“아 불이 났군요. 네? 불이요? 괜찮으신 겁니까?”

“아뇨. 치근덕대는 누구 때문에 짜증만 나네요.”

“네?! 치근덕이라뇨?! 저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자 도착했습니다. 저기 경비실에서 일하는 다크니스 군에게 가시면 안내해줄 거예요. 안녕히 가세요.”

“아…. 저기….”

무언가 말하려는 그의 말을 자르고 내 용건을 말한다.

“저 매지스트 씨랑 친해질 생각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고개를 숙여 사과를 드리고 자리를 나온다. 저 남자가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능글 맞은 농담에 느끼한 멘트들은 듣는 순간 때려 눕히고 싶었지만, 내가 그의 접근을 막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저 남자와 사이가 가까워지면 좋겠지. 쾌활한 성격이라 그와 대화하면 즐거울 것이다. 이 건조하고 스트레스뿐일 일상에 활력소가 되겠지.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그의 앞에서 웃거나 화낼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분명 저 남자는 내가 내는 불꽃을 보고 놀라서 날 괴물 보듯 하겠지. 내가 만난 사람들 모두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똑같을 것이다. 그런 광격을 이십 년 넘게 봐와서 익숙하다고 하지만….

‘상처 받는 건 어쩔 수 없는걸.’

저렇게 밝고 적극적인 사람일수록 내 정체를 아는 순간 나를 보고 겁내었기에.

나를 알기 전과 안 후의 차이가 너무 명백했기에.

다음날부터 내가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 그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됐기에.

또다시 누군가에게 상처 받는 건 피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회사에서도

“아, 안녕하세요 청초 씨.”

“…네.”

살갑게 오는 그의 인사에 차갑게 대하고

“자 청초 씨! 마술을 보여드릴게요! 두구두구두구두구 짜잔! 토끼입니다!”

“사내에는 동물 반입 금지입니다.”

토끼가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참고

“괜찮으시다면 오늘 저녁 같이 드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집에서 탕수육에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해서요.”

“아 저기…. 안녕히 가세요.”

“….”

잘 가라는 인사말에도 꾸벅 고개만 숙이는 무례를 범했다.

‘뽀드득 뽀드득’

처음 만난 날로부터 3일이 지난 토요일 저녁. 취미로 하고 있는 이곳 청초바에서 일하고 있다. 오늘은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자꾸만 가슴 한 편이 무겁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희한하네.

“…슬슬 마감해야지.”

시간도 곧 늦은 밤. 바라고는 하지만 새벽까지 운영하진 않는다. 취미 본위로 네오 부행장에게 부탁해 본사 지하에 마련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는 것도 주말뿐이므로 손님도 얼마 없다. 이곳 지아이디 본사 지하에 사는 어둠속의 망령이나 주말에도 출근하는 직원들이 전부. 하루에 많아 봐야 15명 남짓이다. 오늘은 특히나 손님이 없어서 3명이 전부. 마감시간이 됐다. 이제 정리해야지.

“하하! 여기 아직 영업하나요?”

“죄송합니다. 이제 마감시간인….”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아가씨!”

“…매지스트 씨.”

급하게 뛰어온 듯 숨을 몰아쉬는 매지스트 씨는 힘겹게 의자에 앉으며 평소처럼 능청스레 내게 말을 건넨다.

“이야. 주말에는 당연히 출근 안 하실 줄 알고 제 방에 조용히 있었는데, 아 글쎄 라이베라 님께서 오늘 청초 아가씨와 술 마셨다고 하는 말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 거 있죠? 놀라서 어디서 봤냐고 물어보고 바로 뛰어왔습니다.”

“…그렇군요.”

“너무하신데요? 제 대시는 가볍게 차놓고선 라이베라 님과는 같이 한 잔 하다뇨. 탁구공 얼굴이 취향이십니까?”

“아닙니다. 뭔가 마시러 오신 거라면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사이다 있나요?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잔에 따르려는 때

“아! 잠시만요?”

“네?”

“와인잔에 따라주실 수 없을까요? 저 사이다는 와인잔에만 따라 마시는 주의라서요.”

“…. 네 그렇게 하죠.”

별 이상한 취향이 다 있네.

“자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으음~ 미녀가 따라줘서 그런가 맛이 남다른데요?”

“….”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사람일까.

“어라? 쌀쌀맞은 태클을 기대했는데 무시로 일관하실 줄이야.”

“…왜?”

“네?”

“왜 저랑 친해지려 하는 거죠?”

이해가 안 된다. 왜 이렇게까지 나와 친해지려 하는 걸까. 입 거칠고 짜증만 내고 말도 무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거리낌없이 다가와 말을 걸고 밝게 웃다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겁내며 도망가실 거면서, 왜 저한테 다가오는 건가요?”

내 진짜 모습을 알면 더는 보여주지 않을 그 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을 걸다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어….

“…. 닮았거든요.”

“네?”

항상 웃던 매지스트 씨가 처음으로 장난기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래아. 그 여자와 너무 똑같아요. 얼굴도. 목소리도. 분위기도. 제가 장난을 치면 그냥 넘기지 않고 항상 맞받아쳐주는 점도. 정말 닮았거든요.”

“…전 여자친구인가요? 칠칠맞지 못하네요. 잊을 줄도 알아야죠.”

“그러네요. 하하하…. 저도 참 꼴사납네요. 전 여자랑 닮아서 친해지려 한다고 말하다니. 기분 나쁘셨죠? 죄송합니다.”

‘탁’

그의 앞에 가벼운 안줏거리를 놓는다.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안줏거리예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인 것 같은데, 들어줄게요.”

“탕수육을 안줏거리로…?”

“문제 있나요?”

“아뇨 완전 없습니다. 그나저나 하고 싶은 말이 쌓였다니. 무슨 얘기죠?”

“제가 감정에 예민해서요. 아래아라는 전 여자친구 말씀을 하실 때 매지스트 씨. 되게 슬퍼 보였거든요.”

“하하하하. 눈을 가린 제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으시다니. 제법이시네요.”

“뭐 일주일 내내 밝고 활기찬 모습만 봐대서, 기운 없는 모습을 바로 알아차린 걸 수도 있겠지만요.”

서로 아무 말 없이 적막이 흐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잔을 다 비운 매지스트 씨가 입을 뗀다.

“저는 포베글리아라는 섬나라 출신입니다. 그곳의 리베르라는 작은 섬에 태어났죠. 어릴 적 부모님이 화재로 돌아가셨죠. 어린 아이가 매일매일 엉엉 울며 슬퍼할 때 그 아이를 웃게 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섬을 순회하며 공연을 보여주는 마술사였죠. 그 마술사가 리베드 섬에 체류하며 공연을 하던 한 달. 그 한 달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술사가 되었다며 잠시 말을 마치는 매지스트. 살짝 울컥한 건지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어 나간다.

“마술사가 된 저는 그분처럼 섬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동료를 만났죠. 하모니카 연주를 잘하는 음악가. 곰인형 탈을 쓴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인 동물조련사. 그가 기르는 거대하지만 순한 늑대개. 오페라를 하는 부부. 병을 앓는 가족의 치료비를 위해 호위 일을 지원한 은퇴 기사.”

“그때는 붕대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나요?”

“그렇죠. 이 잘생긴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다시 채운 사이다 잔을 한 모금 마신다.

“그렇게 포베글리아 섬을 순회하며 무대에서 공연하는 나날. 제 고향 리베드 섬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났죠.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연장 맨 앞자리에 앉아 자기 딸울 무릎에 앉힌 그녀가요. 제가 마술을 할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꺄르르 웃으며 절 바라보던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죠. 공연이 끝나고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흔쾌히 자신의 번호를 알려줬죠. 아래아.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유부녀를 노리다니. 대담하네요.”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저녁 약속을 잡고 그녀의 딸 메리 양까지 셋이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혼하고 혼자서 딸을 10년간 키웠다더군요. 그녀의 강한 모습에 한 번 더 반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란 말에 속으로 쾌재를 외쳤죠. 기회가 있다는 거니까요. 그날부터 한 달 동안 그 섬에 머물면서 그녀 그리고 그녀의 딸아이와 사이가 가까워졌습니다. 그녀는 나폴리산 성게요리를 제일 좋아했으며, 제 장난을 항상 맞받아쳐주었습니다. 제 마술을 볼 때마다 새로운 리액션을 보여줬으며, 딸아이를 챙길 때는 정말 다정하고 상냥한 어머니였죠. 메리는 볼프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커다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만나 정말 기쁘다고 말했죠. 집에서 키우자고 아래아에게 졸랐는데 그만 베어 군에게 혼났답니다. 볼프랑 놀려면 꼭 조련사인 자기랑 있어야 한다며 어린 메리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죠. 메리는 거의 매일 볼프와 베어 군을 만나러 왔고, 그런 딸아이를 데리고 놀러온 아래아는 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렇게 자연스레 서로에게 끌린 저희들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다시 한번 매지스트 씨가 잔을 비운다.

“저희들의 사이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응원해 온 동료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습니다. 특히나 에릭과 크리스틴 부부는 정말로 기뻐하더군요. 그 두 사람을 이어준 게 저였거든요. 그때 두 사람이 모두에게 제의했습니다. 이대로 나폴리 섬에 다같이 정착하는 건 어떻냐고요. 메리는 리베드 섬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곧 중학교에 입학해야 되는 메리를 위해 아래아는 중학교가 있는 섬으로 떠나야 했죠. 리베드는 작은 섬이라 초등학교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마침 에릭과 크리스틴 부부도 한곳에 정착해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케르베로스 씨의 부인과 딸도 나폴리에서 지내고 있고요.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아예 나폴리에 정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운명인 듯 저희를 도와주고 있었죠.”

빈 잔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린다.

“어릴 적 제 우상이었던 그 마술사님을 만났을 때도. 저는 세상이 저희를 축복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

말 없이 그의 손을 잡는다.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래아와 이혼했다는 전 남편. 그 파르티아라는 분이 제 우상이었던 그 마술사였을 줄이야. 파르티아 님은 아래아가 저와 재혼하려 한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내더군요. 자신이 버리고 이혼까지 해 관계를 끊은 여자에게. 홀로 어린 딸을 10년이나 키울 동안 돈 한 푼도 부치지 않은 주제에, 자기 여자라면서 재혼은 꿈도 꾸지 말라더군요. 환멸했습니다. 슬픔에 빛을 비추며 웃음을 선사하던 저의 우상이 그런 추악한 남자였다뇨. 더구나 아래아에게 한 짓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래아와 저 그리고 파르티아 님 셋이 대면해 담판을 지었습니다. 파르티아 님도 포기하고 포베글리아를 떠나 이반 제국에 돌아가기로 했죠. 그렇게 모든 게 잘 마무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요.”

매지스트 씨가 잔을 깬다.

“…. 전부 죽었습니다.”

“네?”

“그 남자가 저희 저택에 들어와서 전부 죽였습니다. 언룩도 베어도 볼프도 에릭도 크리스틴도 케르베로스도 전부! 전부!!! 자기 여자를 넘봤다는 이유로 제 친구들을 제 눈앞에서 전부!!!!!!!!”

그가 분노하며 소리 지른다. 붕대로 감싼 눈가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언룩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놔 형체를 없애고!!! 베어는 인형탈을 씌운 채 조각내고!!!!! 볼프는 같은 곳만 수십 수백 번을 찔러 죽이고!!! 에릭과 크리스틴은 서로를 마주보게 한 채로 목을 조여 죽이고!!!! 케르베로스는 살점을 전부 조각내 죽이고!!!! 저는 아무것도 못한 채!!!! 팔다리가 잘린 채 그걸 보면서!!!!! 으아!!! 으아아아아아아!!!!!!!! 다들 나 때문에 죽는 거라고!!! 그 개자식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제야 매지스트 씨의 손목이 보였다. 상의 소매와 장갑 사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그에게 팔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삼십 분 넘게 바닥을 바라보며 내리 운다. 소리치고. 주먹을 내리치고. 자기가 부순 유릿잔 조각에 장갑이 찢어지고. 한참 울분을 토해낸다. 어느샌가 내 몸에서 파란 불꽃이 나기 시작했다.

“……. 그 개자식이 떠나고. 모두가 죽어갈 때 아무것도 못한 저는 모두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웃음귀신 님이 저택에 들어오셨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상황을 보시곤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시더니 곧바로 저에게 오셨죠. 그리고 [영혼불멸]이라는 힘을 받았습니다. 신체의 일부가 없어도 그 기능을 유지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으며, 결손된 신체를 공기가 모방하여 대체합니다. 팔다리가 없는 제가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힘 덕분이죠. 웃음귀신 님께선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눈물을 흘리며 했습니다. 나중에 가 든 의문이었죠. 왜 처음 본 사람이 이토록 사과를 할까 하고. 하지만 당시의 저는 그 죽일 놈에 대한 분노와, 그놈 때문에 위기에 처할 아래아와 메리에 대한 걱정뿐이었죠. 움직일 수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곤 아래아의 집을 향해 달렸죠. 달리고. 달리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눈물과 피에 젖은 붕대를 매지스트가 천천히 풀어나간다.

“다행히 파르티아는 아래아의 집에 들리지 않고 바로 이반 제국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문 너머로 그녀와 메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거든요. 저는 바로 안심하며 두 사람에게 다급히 문을 열어달라 부탁했습니다. 문은 바로 열렸고. 열리자마자 아래아와 메리가 저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제게 건넨 인사말은….”

붕대를 다 푼 매지스트의 맨 얼굴이 보인다.

“팔다리는 물론 눈 한 쪽 없이 피범벅으로 문앞에 서 있는 좀비에게 건넨 비명. 공포. 두려움. 눈물이었습니다.”

붕대 너머 감춘 매지스트의 한쪽 눈이 없는 좀비의 얼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느낄 공포를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받을 마음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하하하. 어리석게도 저는 제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지도 못했던 거죠. 왜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거지? 의아해하며 계속 두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비명은 커졌고. 갑자기 조용해졌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제 친구들도. 제 인생도. 제 우상도. 제 사랑도. 저 때문에 모두가 죽었고. 저는 혼자 살아남아 버렸습니다. 모든 걸 잃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송장으로 살아갔습니다. 매일매일 모두에게 살아남아서 미안하다 말하는 한편, 살아남았기에 복수를 할 수 있다 생각했죠. 그러다 얼마 전 웃음귀신 님께서 복수할 기회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살아남아 버린 죗값을 치를 수 있었기에 저는 바로 어둠속의 망령이 되는 걸 승낙했죠.”

….

“…. 죄송해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분한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요. 자 다시 분위기를 밝게 되돌려볼까요!”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매만진다.

“어라? 청초 씨…? 몸에서 불이….”

“그냥 조용히…. 울게 해주세요….”

“…….”

“앞으론 슬프면 슬프다 말하세요. 혼자 살아남았다고 슬퍼할 자격이 없다 생각하지 말라고요.”

“…감사합니다. 청초 씨.”

슬퍼도 모두를 위해 웃을 수밖에 없던, 웃으면서도 모두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는 그 남자를 껴안고 밤새 울었다.

“건네드린 자료에 써있는 바와 같이 자동인형 산업의 선봉이 된 지아이디 산업은 앞으로도 주주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으로 이번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보고회를 마치고 주주분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다들 별다른 의견이 없었고 모든 주주분들이 회의실에서 퇴장했다. 단 한 명만 남고 말이다.

“이봐이봐! 내가 말한 무통증 연구 건은 왜 없는 거지?! 지금 날 물로 보는 거야?”

매지스트와의 그 일 이후 2주가 지났다. 그와의 만남으로 내가 지금껏 가져온 인식이 바뀌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남들과 거리를 두고 나 혼자 참으며 살아오자 생각했던 지난 세월. 이제는 내가 온전히 감정을 표출하고 부딪혀도 평소처럼 대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남자가 단 한 명 생겼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뭐야 그 옷! 민소매 정장? 왜 팔이 다 드러난 옷을 입고 있어?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입을 만한 옷 아니지 않아? 지금 이거 나한테 대드는 거지? 어?!”

‘화르륵’

“아 X나 시끄럽네.”

더구나 이런 놈들 앞에선 참을 이유가 없단 것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 감정불꽃이 솟아도 탈 걱정 없는 이 민소매 정장을 입고 다니기로 했다.

“뭐…뭐야? 부부부부불?”

“전부터 너에게 하고 싶던 말들이 있었는데 이 참에 다 해야겠다. 너 지 아버지 덕에 그 자리에 앉은 놈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너 진짜 네가 얼마나 한심한지 모르는 거야? 아는 것도 없어, 무언가 듣고 스스로 생각조차 못해, 가끔 내뱉는 헛소리는 맞은 적이 없어. 너 학교는 어떻게 졸업했나 몰라. 그리고 인마. 무통증 연구는 안 할 거라고 오늘 회의 시작 전에 너를 위해 친히 설명해줬는데 그때 안 듣고 뭐했냐? 폰게임한 거 다 봤거든? 그래 놓고 회의 다 끝나고 하는 소리가 뭐? 자기를 물로 본다고? 그래. 물로 본다. 난 불이거든? 지금 너 확 태워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걱정 마. 앞으로 나 볼 일 없을 거니까. 네가 가진 재산 전부 우리 지아이디가 가져가게 됐거든. 네가 얼~~마나 무능하면 나랑 네 부하들이 네 회사를 대놓고 지아이디 그룹에 차례차례 넘기는데 그걸 모르냐?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이반제국에 세우려던 제1공업지구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어. 자 그럼 이제 우리 회사에서 꺼지고 다시는 보지 말자. 안녕!”

“뭐…무…무슨…!”

당황해 얼굴을 울그락불그락하는 놈을 회의실에 남긴채 밖으로 나선다. 내가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화재센서가 작동해 그놈을 쫄딱 적셨다. 아. 진짜 꼬시다. 오늘은 잠자리가 편안하겠는걸. 자기 감정을 표출한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지 이제야 느끼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회의는 잘 마치셨나보군요.”

바로 이 남자 덕분에.

“그러네, 매지스트. 밖에서 기다려준 거야? 고마운데.”

“아하하. 노란 불이 타오르는 걸 보면 진심인 것 같네요. 어라? 청초 씨, 귀 뒤에….”

“응? 내 귀 뒤?”

내 귓가에 손을 갔다댄 매지스트. 그 손에서 나타난 건 아름다운 빨간 장미꽃이었다.

“꽃 뒤에 꽃이 있었군요!”

“…. 장미꽃 마술은 고맙고 기쁜데, 제발 그 이상한 멘트 좀 안 하면 안 돼?”

“하하하하하!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멘트를 어찌 그만둘 수 있을까요!”

“그래.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한 내가 바보다.”

그가 건넨 장미꽃을 받아들고 집무실로 향한다.

“흠…. 장미꽃을 건넨 보답을 하고 싶네.”

“네? 어떤 보답인가요?”

“이런 거려나.”

무덤덤하게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손을 잡고 걷다니! 하하하하! 오늘은 무지 들떠서 잠 못 자겠는걸요. …? 어라? 청초 씨? 팔에서 처음 보는 색의 불이 치솟는데요?”

“그러네. 분홍색 불이네. 나도 처음 본다.”

“뜨겁기는커녕 볼수록 기분이 안정되는데요? 도대체 지금 어떤 감정이신건가요?”

글쎄 어떤 감정이려나.

이 달달하면서도 간질간질한 웃음이 배시시 새어나오는 이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은.

“아마도 너와 같은 감정.“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매지스트와 복도를 걷는다.

이젠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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